하얀 까마귀 2

2016. 2. 2.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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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까마귀 1

2016. 1. 3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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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카테고리 없음 2016. 1. 25. 06:53

-0

 남자가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때는 즐거웠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1

 남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딱 일주일 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강하 씨. 오랜만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가벼웠고, 어딘지 모르게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왕이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 일 말입니다. 왜 저번에 말씀드렸던 일이요.」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일하고 있던 중이기는 했으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그가 입을 열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단박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지금 어떻게, 저번에 만났던 카페로 가면 됩니까?”

 「아뇨.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괜찮으시다면 제 집에서 뵙도록 하죠. 문자로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집이라. 이렇게 멋대로 찾아가도 되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으나 망설임보다 그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남자와의 통화를 끊었다. 문자가 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2

 남자가 사는 곳은 고급 주택이 밀집한 지역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남자에게 전화도 해보았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상투적인 응답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왔다. 몇 번 안 만나보긴 했지만 이런 장난을 칠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놀림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문자에 쓰여있는 주소도 확인해 보았다. 액정에 비치는 숫자는 눈 앞의 문에 쓰여있는 숫자와 같은 것이었다. 뭐야, 대체. 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발로 찼다. 그러기 무섭게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조금은 걱정이 되어 도망갈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하마터면 문에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려다가 문을 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셨군요.” 남자가 웃었다. 미소를 띈 남자의 얼굴은 이전보다 해쓱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볼 일을 보느라.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차를 내오죠.”

 방 안으로 나를 안내하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주방으로 가 음료를 준비했다. 뭐라고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나는 머뭇거리다가 방 한쪽에 자리한 소파에 앉았다.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방 안을 살펴보았다. 정돈이 잘 된 원룸이었다. 아직 어려보이는데 이런 곳에 살다니. 혹시 부잣집 아들인가? 그럼 내게 연락을 할 필요가 없을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커피를 타왔다.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았다. 잔이 하나뿐이었다.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남자는 아, 하더니 내 의문에 답을 주었다.

 “저는 아까 마셨습니다. 커피를 두 잔 이상 마시면 잠을 못 자서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소파 건너편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이 작아서 그런지 소파와 침대 거리가 가까워 나는 마주보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데 다행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생각해봤죠. 이제야 기억이 났어요. 그에 대한 일이요. 강하 씨가 듣고 싶다고 하셨었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남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음. 이야기가 길어서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 지.”

 기억을 더듬듯 남자는 한참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인상을 찌푸린 모습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이 났는지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그러나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음산한 방 안 분위기 속에서 그의 눈빛만이 반짝거렸다.


-3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요. 처음 만난 날부터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죠? 그와 제가 마주친 것은 이 근처 공원이었습니다. 그떄가 재작년 겨울이었으니 한 일년 반 쯤 된 것 같네요. 날짜는 정확히 기억해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죠. 기분이 굉장히 나빴던 기억이 나요. 기르던 개가 그 날 아침에 죽었고, 부모님이 전화를 하신 데다가 그날은 눈까지 왔거든요. 커플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혼자 거리를 걷는 건, 뭐 말씀드리지 않아도 어떤 기분일지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하여튼 저는 하릴없이 공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눈발이 거세지던 터라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가 제 눈에 띈 것은 그 순간이었어요. 어떤 남자와 함께 제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죠.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요. 공원 저 끝 벤치 쪽에서 저를 향해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요. 키는 저보다 한 뼘정도 작았나? 그래도 꽤 컸던 걸로 기억해요. 추운 날씨 탓인지 베이지색 더플코트를 걸치고 있었어요.

 그가 어땠냐고요? 음. 그래요. 인상적이었어요. 뭐가 인상적이었냐고요? 같이 있던 남자가요, 그에게 목도리를 둘러줬거든요. 근데 그 찰나에 보인 웃음이요. 정말로 행복해 보였어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서 그를 쳐다볼 정도로요.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그 둘이 연인이구나, 하고요. 그렇잖아요? 평범한 남자 둘이, 그것도 길거리에서 그런 닭살 돋는 짓을 하겠어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순간 아, 이 남자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유요? 그런 건 없었어요. 원래 사람이 반하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게이라는 말은 아니고요. 저는 그와 대화를 하고싶었어요. 그래서 그가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옆에 연인이 있는데 거기서 말을 걸기는 좀 그렇잖아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기는 좀 부끄럽지만, 그 둘이 움직이는 동안 저는 계속 뒤를 따라갔어요. 다행히 그쪽에서는 저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요. 예? 뭐가 부끄럽냐고요? 이보세요, 이강하 씨. 생각해보세요. 건장한 남자가 몰래 사람을 미행하고 있으면 얼마나 수상해보이겠어요? 스토커같잖아요. 물론 제가 스토커처럼 허술하게 누군가를 따라다닐 사람은 아닙니다.

 하여간 저는 그 둘을 따라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은 헤어졌죠. 한 두 시간정도? 와, 그 표정은 뭔가요. 완전 질린 표정인데. 스토커 맞다고요? 본인 앞에서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강하씨, 제 얘기 듣고싶지 않으신가봐요? 미안하다고요? 뭐 알았어요. 이번만 제가 넘어가주죠.

 둘이 헤어지긴 했는데, 조금 의외였어요. 열두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모텔에 들어가면 근성으로라도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제가 다 허탈해질 정도였어요. 더 어이없는 거 말해드려요? 둘이 글쎄, 뽀뽀를 하더군요. 키스 말고요. 뽀뽀 말이에요, 뽀뽀. 그냥 입맞춤이요. 아니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 몰래 입 맞추고 얼굴 붉히고 좋다고 웃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가 다 간지러워서 죽을 맛이더라고요.

 제가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같이 있던 남자가 얼굴이 벌개져서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렸어요. 저로서는 잘된 일이었죠. 만약 그가 남자와 함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더라면 저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고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남자라면 한 방이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던지, 아직도 그때 그 기분이 생생해요. 그의 눈동자가 제게 향하는데, 저도 모르게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을 꽉 쥐었어요. 뭐, 그러고 나서 끝이었지만.

 대화요?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요? 별 말 안 했는데요? 초면에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저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수상한 사람, 그것도 그와 같은 남잔데. 저야 그가 남자와 뽀뽀하는 걸 봤지만 그는 제게 들킨 걸 모르잖아요. 그냥 스쳐지나갔을 뿐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로 남자를 만났어요. 이듬해 봄이었죠. 네, 작년 3월 경이요.”


-4

 남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말해달라고 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래서 잠자코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미동도 않고 남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곤 변명하듯이 내뱉었다.

 “시기는 기억이 나는데 인상이 흐릿하군요. 처음 만났을 때만큼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쩔수 없죠. 모든 것이 그렇잖아요? 뭐든 처음이 가장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법이죠. 강하 씨도 동의하실 겁니다. 첫 키스는 확실히 기억 나도 그 후에 언제 키스했는지 전부 기억난다고 말 할 사람은 없을 걸요.”

 이 말을 하고 남자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괜찮으니 계속 이야기 하시죠.” 나는 남자를 재촉했다. 이런 이야기라도 내게 해줘서 다행이었다. 그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그가 운을 뗐다. “첫 번째처럼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하실까봐 조금 긴장했었어요. 그럼 계속하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겨우 두 번째인데 생각해내는 것이 힘겹다는 듯이 그는 인상을 쓴 채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건조해져 있었다.

 “두 번째로 만난 건 커피숍에서였습니다. 손님이 많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죠. 직원은 그와 다른 여자 분까지 둘 뿐이었어요. 그때는 머리가 꽤 길었죠. 그 말이에요. 묶을 수 있을 정도였어요. 거기서 파는 음료는 별로 맛이 없었어요. 단지 그를 보려고 그곳에 갔죠.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보니 천천히 다가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일주일에서 한 번? 두 번? 쯤 그곳에서 커피를 사 마셨어요. 너무 자주 가는 것도 그렇잖아요? 한 달 쯤 되니까 그가 저에게 말을 걸어 주었어요.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 포인트 카드 만들어 드릴까요?’ 뭐 이런 내용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와 제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는 표정이시네요.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처음에 스토커같이 굴었다고 해도 평소에 스토킹을 할만큼 저는 한가하지 않아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알고 나서 그와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사람은 자신과 공통점이 있는 상대에게 경계를 허물기 마련이고, 그도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학교에서 마주쳤죠. 저를 그냥 지나칠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에게 소개를 해주더라고요. 하지만 그 날 이후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카페에 나오지 않았죠. 학교에서도 볼 수 없었고요. 대충 들어보니 자퇴수속을 밟았다는 것 같았습니다. 안타깝지만 그의 친구들과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라 무슨 일인지는 물어볼 수 없었어요. 그렇게 또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번째는 6월? 아니 7월이었던 것 같네요. 네. 작년 여름이요. 지금만큼 더웠죠. 비가 내리던 날이었어요.”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내게 제안했다.

 “긴 이야기를 했더니 목이 마르는 군요. 물 한 잔만 마시고 다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5

 남자는 거짓으로라도 못생겼다고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남자에 대해 들었을 때 그의 외모에 관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외모를 보고 조금 놀랐다. 그는 TV에 나오는 여느 연예인만큼 준수했고, 지나가는 옆집 청년보다 친근감이 들 정도로 선해 보였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 듯, 몇 번 마주친 동네 아주머니들은 남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던 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집 청년? 글쎄, 아주 참하다니까. 저번에는 내가 장을 너무 많이 봐서 이걸 어쩌나 하고 있는데 도로에서부터 나를 도와주는 거 있지? 요 옆집에 아가씨가 하나 사는데, 그 아가씨도 그러더라고. 빈혈로 쓰러졌을 때 병원까지 데리고 갔다고. 생긴것도 순하게 생겨선 어찌나 착한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르던 남자가 내 시선을 눈치채곤 선생님도 드릴까요? 하며 물었다. 커피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꺼내려던 컵을 도로 건조대에 올려놓으며 머쓱한 듯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게 재미있으세요?”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난데없는 남자의 질문에 놀라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물이 든 잔을 흔들어 파문을 만들었다. 잔이 그의 손에서 기울며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렸다. 목이 마르다고 한 말과 달리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는 그쪽은 왜 흔쾌히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까?”

 나의 반문에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가만히 식탁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 답은 강하 씨가 찾으셔야 합니다.”

 몹시 우울한 얼굴이었다.


-6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은 잔의 손잡이 부분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했고, 내겐 그가 그 약속을 지킬 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있었다.

 “7월이었죠.”

 가만히 시계의 초침소리를 듣고있던 나는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떨었다. 그것을 본 남자가 빙그레 웃음지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그는 말을 이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죠. 더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정말 푹푹 찐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름이었습니다. 잠 못드는 밤이 계속되었죠. 짜증이 나던 차에 좀 시원할까 싶어서 한강으로 나갔어요. 마침 장마가 지나간 직후라 그렇게 시원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대단하죠? 이정도 되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고싶었어요. 그는 더운지 앞머리를 머리띠로 올리고 있었죠. 그 모습이 좀 우습긴 했어요. 제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많이 덥네요.’ 그가 대답해줬어요. ‘그러게요. 정말 덥네요.’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장소만 다를 뿐 그 이후론 전부 그런식이었죠.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수영장에서 만나기도 하고. 언제는 스키장에서, 언제는 도서관에서. 세상 좁다는 말이 실감이 났어요.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잘만 마주쳤으니까요.”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컵을 들여다보던 눈을 내게로 돌렸다.

 “그렇게 이어지던 관계가 변한 것은 꼭 여덟 번째부터였습니다.”

 “변하다니요?”

 무엇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의 정체를 아는 양 그는 웃었다. 아니, 나는 그가 웃고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까부터 무표정했다. 무언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넘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엉뚱한 사람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속이 답답해 목 끝까지 채웠던 셔츠 깃 단추를 하나 풀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권유를 거절한 것이 방금 전인데, 나는 이 얼마 되지 않는 침묵에 갈증이 났다. 그것은 방금 느낀 이상한 느낌 탓인지도 몰랐다.

 “제가 그의 집에 찾아가게 되었으니까요. 여덟 번째로 만난 것은 올해 4월에 들어서입니다. 그 즈음에 마침 벚꽃이 만개했었죠.”

 그가 부엌에 있던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어둑어둑하니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오늘같이 흐린 날이었어요. 활짝 핀 꽃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죠. 저는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어요. 그에게 돌려줄 것이 있었거든요.”

 “돌려줄 것이요?”

 “네. 가방이었습니다. 이만한 크기의.”

 그가 팔을 들어 대략적으로 모양을 그려냈다. 크기로 보아 백팩으로 보였다. 나는 긴장하며 그에게 물었다.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었습니까?”

 “별 거 없었어요. 전공 서적하고 필통, 뭐 이 정도? 지갑이나 이런 건 들어있지 않았지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그날은 주말이었고, 그가 집에 있는 날이었거든요.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제가 직접 가져다주러 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갈 만큼 친해지진 않아서 가방만 주고 왔지만요. 그 후로는 더 자주 놀러가게 되었죠. 자주라고 해봤자 이, 삼 주에 한 번 정도였지만요.”

 “그래요?”

 힘이 빠진 내 대답에 그는 즐거워보였다.

 “실망하신 것 같네요.”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탓이다. 그는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것도 같았다.

 왜일까? 나는 아까부터 무언가가 찜찜했다. 무엇인가 잊고있는 것 같은 떨떠름한 기분이.

 “아직 이야기가 남았으니 그리 낙담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봤자 이게 마지막이지만.”

 남자가 불현듯 잔을 들어 미지근해졌을 그 물을 삼켰다. 그리고는 그가 마지막이라고 밝힌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7

 “이제 겨우 한 달 남짓한 일입니다. 그에게 초대받아 그의 집에 찾아갔어요. 그게 아마 열세 번째였을 겁니다. 7월이었는데 꽤나 덥더군요. 그의 집엔 늘 그랬듯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열쇠는 제가 갖고 있었거든요. 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가는 건 실례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엔 너무 더웠어요. 그와 제가 이미 예의를 차릴 사이는 아니기도 했고요.

 나중에 집에 온 그는 놀랐지만, 그래도 절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즐겁게 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스킨십도 했죠. 익숙해질만 한데도, 그는 매번 수줍음을 탔어요. 부끄러운 듯이 제 손길을 피했죠.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매만졌어요.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새하얀 얼굴도, 가느다란 팔도 다리도, 가녀린 목덜미도. 그가 기쁜 듯이 몸을 뒤틀었습니다. 매번 그러했듯이요. 그러다가 지쳤는지 금세 잠들어버리더군요. 그때가 여덟 시 삼십 분이었어요. 똑똑히 기억나요.

 저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구나.

 새하얀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켰습니다. 자고있는 그에게는 이불을 덮어주었죠. 아침이 밝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어요.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자더군요. 그런 그를 깨우기가 뭐해서, 아침이 되자마자 저는 아파트에서 나왔습니다.”


-8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설마싶어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끝이에요?”

 밀려오는 허탈감에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남자가 톡톡 식탁을 두드리다가 네, 하고 대답했다. 다급해진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는요? 그것에 대해 제보해주신다면서요?”

 나의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 못한 기색이었다. 그 태도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단 말인가.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낭비도 이런 시간낭비가 없었다. 처음 왔을 때 다섯 시를 가리키던 시계는 벌써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한 마디라도 해 주려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순간 남자가 상냥하게 웃었다. 톡, 톡하고 그가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선수를 쳤다.

 “말해드렸잖아요.”

 “예?”

 멍청하게도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남자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강하 씨. 제가 당신을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

 사고가 멈춰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태엽인형처럼 예? 하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톡, 하고 그가 식탁을 건드리던 것을 멈추었다. 시계의 초침소리와 남자의 시선. 기묘한 공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 그제야 나는 겨우 남자의 얼굴을 표현할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포식자와도 같은 형형한 빛을 보이고 있었다.

 “열세 번째.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제가 그 연쇄살인범일 거라는 생각, 안 해보셨나봐요?”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9

 열세 번째. 그는 남자가 한 말을 곱씹으며 당장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말에 여태까지 느끼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열세 번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지난 달에 발견된 시체가 꼭 열세 번째 시체라고 경찰이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직업 정신이라는 게 참 대단해요. 뭐든 건수가 있으면 달려들고.”

 남자가 빈정댔다. 강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나친 긴장감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남자가 그런 강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제 이름,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그 기사 말입니다. 제목이 뭐였더라? 사진까지 당당히 실은 그 기사요. 아, 기억 안 나세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당신같은 사람에게 그 애는 놀이같은 것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흥미 위주로 찝적댄 거였죠? 그 애가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대했는 지는 생각하지도 않았겠죠. 왜 그러세요, 강하 씨? 얼굴이 창백하신데요. 혹시 기억 나셨나요?”

 남자가 느릿하게 말하며 강하를 쳐다보았다. 강하의 얼굴은 남자가 말한 것과 같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강하는 ‘무슨, 무슨 말을.’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는 그런 강하를 유심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흠. 기억나지 않으시나 봐요? 뭐 상관 없어요. 당신이 기억을 하든 말든, 기억이 나서 나에게 용서를 구하든 나를 욕하건 뭘 하든 나는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거든요.”

 “이, 이보세요.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강하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남자는 강하를 향해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어둑한 바깥 풍경과 집의 노란 조명이 어우러져 남자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남자의 표정은 상냥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두렵다고 강하는 생각했다.

 “착각이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관없어. 여태까지 죽은 열 세명도 당신 하나 찾으려고 죽인 거니까. 당신이 아니면 다시 찾으면 되는 거고. 안 그래요, 이강하 씨? 그게 연쇄살인범이라는 거잖아? 자기 만족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거.”

 순식간에 돌변한 남자의 태도에 강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남자는 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강하는 여태까지 죽은 열세 명과 자신의 공통점, 그리고 자신이 썼다는 그 기사가 무엇인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자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맨 처음 찾아간 건 당신에게 조언을 해준 그 남자였어. 당신에게 그 클럽에 대해 언질해준 놈이었지. 네놈이 사진을 실은 것도 모자라 실명을 쓴 탓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거든. 부모란 위인이 사진에 모자이크 좀 한다고 자식 못 알아볼 사람들은 아니잖아? 학교만 해도 그래. 알아볼 사람들은 그 사진 하나만으로 기사에서 언급한 그 동성애자가 그 애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보더군. 알아? 그 애는 그날로 정신병원에 처박혔어. 그 애의 핸드폰에는 수십 통의 메시지가 쏟아졌지. ‘기사에 나온 거 너 맞아?’ ‘너 호모야?’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아줘.’ ‘좀 그렇다.’ ‘더러워.’”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살면서 숱하게 듣지만 면전에 대고 듣지는 않아서 견딜 수 있는 그런 말들. 그런 취급을 친지에게 당하는 기분이 어떨 거라고 생각해요?”

 아.

 지독히도 냉랭한 남자의 눈을 보고 강하는 멋쩍게 웃던 어떤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이런거 처음이에요, 하고 수줍게 속삭이던, 남자와 똑같은 얼굴로 강하를 쳐다보던 삼 년 전의 그를.

 “가족들은 비난하고, 사람들은 폭언을 서슴지 않았죠. 어떻게 되었을 거 같아요?”

 남자가 킬킬거렸다. 그것은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애는 죽었어. 퇴원한 바로 다음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거든요. 바로 밑이 인도였는데, 그 예쁜 얼굴이 다 뭉개져 뼈가 들여다보였죠.”


-10

 “미쳤어! 고작 그런 일로, 그런 일로 열세 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나까지 죽이려 한다고?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군!”

 강하는 발악했다. 어떻게든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어서 몰랐건만, 아무래도 그 커피에 약을 탄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현관은 남자가 막아선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창문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강하는 풀리는 다리로 애써 뒷걸음질쳤다. 남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쳤다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 애가 죽고 나서, 하루하루가 지옥같았으니까요. 친척들은 수군거렸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싸워댔죠. 기어코는 나까지 의심하더군요. 너도 네 동생처럼 그런 거 아니냐고. 너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어머니는 미친 것 같았어요. 매일같이 내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감시하고 내 핸드폰을 몰래 들여다보고 통화 내역까지도 뽑고. 학교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죠. 내가 없을 때마다 방을 뒤지는 건 예사였어요. 꼭 스토킹을 당하는 기분이었죠. 하루가 멀다하고 친구 딸이라며 여자를 만나라고 닦달하는데,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외면했어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저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냐고 따졌죠. 매일, 매일, 아침마다 밤마다 질리지도 않고 싸웠어요. 아버지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어머니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시간은 늘어만 갔죠. 나는 학교 안에서도 손가락질 당했어요. 잊을만하면 꼭 누군가가 입을 열었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별거를 시작하고, 이혼 이야기를 꺼내도, 아버지가 새로운 여자와 만나는 것보다도, 나는 당신의 그 쓰레기같은 기사 때문에 내 동생을 잃었다는 게 더 슬펐어.”

 “나, 나는.”

 이를 딱딱 부딪히며 강하가 말을 더듬었다. 더이상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고작 세 걸음. 남자와 강하의 거리는 그 정도였다.

 “기억나죠, 강하 씨? 아까 말했던 그 첫 번째 남자분 말이에요. 그 사람이 말하는 걸 듣고 말았죠. 그 사람은 동생이 죽은 걸 술안줏거리로 삼으며 조롱했어요. 그때 생각했죠. 내 동생이 그렇게 괴로워한 이유는 뭐였을까. 내 동생은 왜 그렇게 죽었을까. 계속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 동생은 죽었는데, 내 동생이 죽는데 일조한 사람은 저렇게 웃고 있는데. 남의 가정을 박살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로 웃고 떠드는 걸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 남자도, 내 동생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던 사람도. 내 동생과 사귀었던 사람도. 내 동생과 가장 친했던 친구도. 클럽에서 만났다는 남자들도. 그 애의 자살과 관련된 사람은 전부. 조금이라도 관여한 사람을 어느 누구 하나 용서할 수가 없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누구 한 사람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어서 모두 죽였어요.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남자가 강하를 내려다보았다. 등을 등지고 있어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강하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오줌을 지릴 것만 같은 공포였다.

 남자가 손을 뻗어 강하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단지 손을 가져다댄 것 뿐인데 언제 숨을 죄어올 지 몰라 강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기어코 다리가 풀려 강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은 남자가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강하의 귓가에 들려왔다.

 “강하 씨.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했지만, 당신도 똑같지 않나요? 당신은 그 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잖아요? 이름은 아나요? 자기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각은 있나요?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지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복수하고 싶었는지.

 그렇게 사분거린 남자는 주저없이 그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Posted by Shao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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